이어진 고리 :: 2008/08/29 00:36
이어진 고리
By. EunYunee
짙게 푸르던 빛이 붉은 물결에 의해 침범당해 가고 있었다. 하늘은 어느 순간부터 물기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주변을 스치우는 바람은 스산하게 울어댔지만 홀로된 감정을 삼키려는 듯 쓸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멀리까지 퍼져나가는, 타는 듯한 그 빛은 닿는 사물마다 붉게 물들였고, 마치 심장의 그것인 마냥 두근두근 뛰었다. 그 박동소리를 뒤로하고 해는 저물어가고 밤 버들의 색색거리는 낮은 숨소리만이 공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지나가는 길목에 누군가의 작은 발걸음소리가 잠을 자고 있던 풀벌레들을 깨웠다. 탁, 탁, 하고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그 소리에 맞춰 잠을 방해한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려는 듯 잎사귀 사이사이에서 그들의 울음소리가 가득 찼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몸짓에 익숙해져있는 듯한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은 짐짓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듯 웃음 지으며 지나칠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을 뒤로한 채 자신이 목적지로 삼은 곳으로 향하던 그의 눈앞에 자그마한 숲 속 공터가 펼쳐졌다. 낮이었다면 푸른 나무의 내음을 맡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제법 많았을 법했지만, 스러지는 낮 빛 속이라 그런지 그 남자 이외에는 어떤 사람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열구름 마냥 평화로운 그 곳에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나무 등걸에 놓았다. 순간 평소 보아왔던 풍경과 다른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그의 눈이 공터의 한 구석 어딘가로 향했다. 그의 눈이 닿은 곳에는 자그마한 아이가 앉아있었다. 하늘의 빛에 닿은 아이의 머리는 연붉게 물들어 있었는데, 본디 그 색깔 역시 그 빛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는 듯 보였다. 아직 어려보이는 데 왜 이곳에서 혼자 잠들어 있는 것일까 하는 순수한 호기심이 그를 자극했다.
호기심에 못 이긴 그는 그 아이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자신의 걸음소리도 알아채지 못한 듯 깊게 잠든 소녀는 눈을 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소녀의 앞에 도착한 그는 그제야 그 아이가 사람이 아니라 홀로 남겨진 인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버려진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새 것 같은데?’
그는 일으켜 세워 봤자 자신의 무릎께밖에 오지 않을 듯한 그 인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둑해져 가는 그 숲 속에서 그 인형의 피부는 눈부실 듯 하얬고, 가까이서 보니 머리색은 빛바랜 꽃잎처럼 연분홍색이었다. 그는 그 인형의 어깻죽지 밑으로 뻗어있는 부스스한 머리를 향해 손을 내밀다 말고 다시 움츠리듯 오므리는 행위를 반복하다 결국 포기한 듯 일어서 내려놓은 자신의 가방을 향해 갔다. 자신의 것이 아닌 이상에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 듯 했다.
그의 가방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물건들이 나왔다. 보면대와 여러 가지 악보 꾸러미가 나오는가 싶더니 악기케이스가 그의 손에 들려져 있었다. 살짝 심호흡을 하듯 그 악기케이스를 내려놓고 깊은 숨을 들이 내쉬던 그는 이내 그 기다마한 케이스를 열고 악기를 꺼내었다. 어슴푸레 떠오르는 달빛에 반사된 악기의 은빛이 눈부셨다. 두 손으로 소중히 감싸듯 악기를 매만지던 그는 자신의 행동이 우습다는 듯 피식 웃더니 보면대를 제대로 땅 위에 세우고, 악보 꾸러미를 뒤적이더니 종이 하나를 선택해 그 위에 펼쳤다. 그러고 그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악기를 연결했다. 제법 공들여 보관해온 듯한 플루트는 그의 손 안에서 더욱 빛을 내는 듯 보였다. 그렇게 옆으로 플루트를 눕혀 잡아 바람구멍으로 입을 가져가 대던 그의 눈이 불현듯 여전히 가만히 나무 기둥뿌리에 기대어 앉아있는 인형을 향했다. 그는 자그맣게 미소를 짓더니, 마치 그 인형을 향한 연주라는 듯 인형을 향해 마주하고서 조심스레 눈을 감고 그 작은 관을 향해 숨결을 불어넣었다.
부드럽게 감은 그의 두 속눈썹이 음의 흐름을 타고 흔들렸다.
잔잔하게 울리는 그 음은 방금 전만 해도 시끄럽게 울어대던 풀벌레들을 다시 잠재웠고, 숲 전체에 평온한 물결을 퍼져나가게 했다. 그의 연주는 타고난 음감에 의한 것이라기 보단, 오랜 연습에 의한 것인 듯 했고, 관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손가락을 움직이던 그의 모습은 진심으로 연주를 즐거워하는 듯 보였다. 이 곳을 찾아온 것도 다른 누군가의 방해를 받지 않고 혼자만의 소리에 빠져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플루트의 음률을 만들어내던 그는 감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리고 깜짝 놀란 듯 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제껏 아무런 반응 없던 그 작은 인형의 눈이 자그맣게 떠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아직 꿈결에서 덜 헤어 나온 듯 -충전된 에너지가 다 닳은 것일까- 인형의 눈에는 힘이 없었다. 그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 인형은 가만히 지켜보며, 자신이 만들어낸 음에 의해 그 인형이 깨어난 것일까 하는 생각을 멍하니 하면서 연주를 계속했다. 그러자 그 인형은 플루트 위에서 움직이는 그의 손을 발견한 듯 고개를 들어 인형과 거리를 두고 마주한 그를 힘없는 눈으로 마주보았다.
이윽고 그의 연주는 끝이 났다.
그는 플루트를 한손으로 감아쥐고는 그 인형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케이스 위에 플루트를 내려놓고 다시 한번 인형이 앉은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몸을 낮추어 인형과 눈높이를 마주했다. 인형은 여전히 말이 없었으나, 그의 눈길을 가만히 받아주고 있었다.
“제 연주가 마음에 들었어요?”
그의 작은 목소리가 인형의 귀에 들어왔다.
“매일 여기서 혼자 플루트 연습을 하곤 했는데, 누군가 관객이 있는 건 처음이네요.”
한껏 그림자를 두른 하늘 아래에 그와 눈길을 마주한 그 인형의 눈은 투명한 벽안이었다. 와, 하고 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어떻게 이렇게 순수한 하늘빛을 여기에 담을 수가 있었을까.’
호기심이 잔뜩 어린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름이 뭐예요?”
그제야 인형은 그의 말에 반응을 보이고 입을 자그맣게 열었으나,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이름이 없는 것인가.’
그는 조금 난처해하며 인형의 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잠시 고민했다. 인형의 눈에는 무언가 간절한 바람이 어려 있었다. 무엇을 바라고자 하는 바인지 생각하던 그는 이내 웃으며 말했다.
“조금 더 제 연주를 들려드릴까요? 으음- 이번에는 무슨 곡이 좋으려나.”
다시 자신의 작은 무대로 뒤돌아서 걸어가려는 그의 바지를 무언가 붙잡았다. 움찔 놀라 돌아보니 그 인형이 자신의 바짓단을 꾹 잡고 있었다. 그는 인형의 반응에 당황해하며 밑을 내려다보았다. 인형의 눈이 방금 전보다 더 간절히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다.
“음, 그러니까 제가 연주를 들려드리려고 하는데….”
그가 다시 발걸음을 내딛자 놀랍게도 인형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한 발짝 한 발짝 힘겹게 걸음을 떼었다. 그 모습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아, 그는 왠지 모를 걱정을 하며 몸을 낮추어 인형의 작은 손을 잡으려는 듯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 없는 듯 손을 움츠리려 했다. 그 순간 인형의 작은 손이 그의 손을 붙잡았고, 그 자그마한 체구의 인형이 그의 품에 와 안겼다. 인형의 행동에 그의 심장이 놀란 듯 두근두근 뛰어왔다. 그렇게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품고 나오지 않으려 하는 그 인형을 그는 조심스럽게 두 팔로 끌어안았다. 조금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연분홍 비단을 매만지는 기분이 들어 묘했다. 그러자 얌전히 잠든 듯 했던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그의 것이 아닌 인형을 보듬고 있는 그를 질책하는 듯이. 그는 풀벌레를 향해 조금 봐주라는 듯 작은 미소를 건네며 그의 품안에서 다시 잠이 들려는 것 같은 소녀를 가만히 품어주었다.
얼마를 그러고 있었는지, 이제는 깊은 숨소리를 내며 숲마저 잠들어갔고, 그 역시 인형을 안고 있는 자세가 뻐근한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제 슬슬 집에 가야할 시간인데, 하는 생각을 하던 그의 품안에서 소녀가 다시 움직임을 보였다. 가슴에 파묻었던 얼굴을 가만히 들고서 그를 향해 소녀가 미소를 지었다. 아까보다 한껏 힘이 든 듯 밝아보였다. 그는 그런 소녀를 보며 방금 전까지 팔이 아파왔다는 것마저 잊으며 소녀를 향해 마주 웃었다.
‘체온에 의해 충전이 되는 인형인가…’
소녀는 손끝을 가만히 움직여 보더니 그의 품에서 나와 섰다. 소녀를 땅에 내려놓으며 그는 소녀를 향해 다시 물었다.
“그래, 이제 괜찮아졌나요?”
하지만 여전히 소녀는 말이 없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그가 다시 소녀의 이름을 물었지만, 소녀는 그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웃을 뿐이었다. 소녀는 무언가 그가 해주길 바라는 듯 가만히 그의 눈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제야 깨달은 듯 그가 ‘아’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저보고 이름을 지어달라는 건가요?”
그러자 소녀는 고개를 한껏 끄덕였다. 소녀의 하늘빛 눈동자가 투명하게 반짝였다. 그는 잠시 고민을 했다. 아직 이름을 받지 못한 채 이곳에 홀로 떨어져있는 소녀의 모습에서 그는 무언가를 느낀 듯 했다.
“나이아드(Naiad; 물의 요정) 셀레스티안(Celestian; celestial 하늘빛의) 은 어떤가요?”
나이아드는 눈을 간질이는 태양의 손길에 부스스 눈을 떴다. 그리고 가만히 반은 행복한 듯, 그리고 절반쯤은 슬픈 듯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그의 꿈을 꾸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의, 눈부시게 빛나던 그의 따스한 품안이 마치 방금 떠나간 듯 시렸다. 나이아드는 그와의 만남 이전의 기억이 없었다. 그 이전에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자신이 누구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와 함께 했었던 시간만이 남아있었다. 자신의 귀에 ‘나이아드’ 하고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는 이젠 어슴푸레해져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의 포근한 마음만큼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나이아드는 그와의 만남이 끊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나이아드에게 단지 행복하게 웃는 법과, 즐겁게 사는 법, 그리고 그가 사랑해왔던 플루트 연주법만을 가르쳐주었을 뿐이었으니까. 어디인가 살아있을 거라고, 조심스레 소망해보며, 믿음을 잊지 않기로 나이아드는 다짐했다. 그 기다림이 몇 년을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아니 천년을 간다고 하더라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셀리- 일어났어요?”
“앗, 네! 방금 전에 일어났어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대답하는 나이아드의 목소리는 밝았다. 눈앞에 나리는 햇살만큼이나 밝고 따스했다. 그런 나이아드를 보고 누군가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무슨 좋은 꿈을 꾸었나봐?”
나이아드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정말이지- 행복한 꿈이었어요. 절대 끊어지지 않을, 사라지지 않을….”
:The dolls 합격 과제였습니다. 한번 놓치고, 겨우 합격했네요-! 얏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