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바라기 :: 2008/10/18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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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하늘, 말간 분홍빛 머리 소녀의 발걸음을 따라 고운 결의 치마가 제 자락을 활짝 펼치며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마치 탁, 탁, 하는 경쾌한 발걸음의 박자에 맞추어 왈츠를 추는 것 같이, 오색 빛으로 물든 옷자락은 그것 그대로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이 보였다. 옷마저도 그것을 입은 자의 설레는 마음을 느끼고 있는지 그날 아침의 그 반짝이는 햇살을 전체에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저, 저기 셀리안- 기다려 주세요!”
레이첼이 한참 앞에서 가는 소녀의 뒤를 쫓으며 달리자, 그녀의 따듯한 커피 빛의 머리가 공중에 나부꼈다. 그녀의 키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나이아드였기에 발걸음이 그리 빠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열에 들떠 나아가는 소녀의 달리기는 생각 이상으로 빨라서 따라잡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소녀는 레이첼을 뒤돌아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레이첼, 얼른 와요!”
“그러다가 넘어질지도 몰라요!”
그녀가 그렇게 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나이아드는 발목께 까지 내려오는 치맛자락에 걸려서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제야 나이아드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 레이첼은 당황하며 소녀를 살폈다. 다친 곳은 없는 듯 했으나 소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그런 소녀의 표정에 그녀는 잠시 혼자 조그맣게 풋, 하고 웃더니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봐요, 제가 넘어질 거라고 했잖아요.”
“으응 …그치만, 달님이 기다리다가 지쳐서 가버릴지도 모르잖아요.”
소녀는 야단맞은 듯한 시무룩한 표정으로 조금 머뭇거리며 레이첼의 눈치를 살폈다. 벌 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초등학생의 그것과 같은 표정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녀가 그저 살포시 웃으며 ‘어서요-’ 하고 손을 다시 내밀자 이내 나이아드는 배시시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오랜만에 가을 특유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바깥 공기를 맞고 있다는 생각에 나이아드는 아침부터 꽤나 흥분해 있었고, 그래서 다른 것들은 -발아래의 돌부리라든지- 소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늘색 나이아드의 눈보다도 더욱 새파랗고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는 하늘 아래 마치 심장박동이 들려올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것 같이 멀어 보이기도 하다가, 손을 내려보면 도리어 낮게 드리워진 그 색에 압도될 듯한 하늘이었다. 그 묵직한 무게감은 오후 내내 진하게 남아 있다가 오후 늦게야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나이아드에게 있어서 두 번째로 맞이하는 '추석'이라는 보름달이었다. 물론 첫 번째의 추석과 옆에 있는 상대는 바뀌어있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까지 변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나이아드는 다시금 저 위에서 그 세상을 굽어보고 있는 그 환함을 마주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역시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에 나이아드는 얼굴 한가득 웃음을 드리우며, 잡은 레이첼의 손을 이끌었다.
“달님, 아직 기다리고 있겠죠?”
“물론이죠.”
아직 주변은 푸른빛 아래였지만, 하늘은 서녘에서부터 불그스름하게 상기되어 가고 있었다. 제법 낮이 짧아져 갔고, 그 상기된 하늘의 부끄러운 듯한 뺨을 따라 지상에서 나무들도 제 잎사귀에 붉은 빛, 노란 빛 물감을 풀기 시작했다. 그 붉고 노란 물감은 다시 나이아드의 저고리 소매로, 치마 아래로 내려와 앉아 소녀와 같은 웃음을 피었다. 그것이 다시 나이아드의 손을 타고 넘어가 레이첼에게로 닿았을 때, 웃음은 다갈 빛으로 자신을 변화시켰다.
이번에 둘은 걸음을 맞추어 걸었고, 한복자락이 그 걸음걸음의 음률을 타고 있었다.
“레이첼, 레이첼-”
소녀는 그녀를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레이첼 그녀야 상대 쪽에서 자신을 편하게 대해준다면 기쁘지만, 자신은 소녀의 애칭을 부르는 것도 망설이고 고민했었던 일이기에, 그렇게 쉽게 다른 이들과 친해지는 나이아드의 성격이 부럽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아이 같은 티 없이 맑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애교스럽게 부르는 것 역시.
“으응, 네?”
호기심 가득한 소녀의 눈동자가 가을과 하나 된 그녀의 눈동자를 향하며 물었다.
“있잖아- 왜 추석에는 달님이 제일 커지고 제일 밝아져요?”
생각지 못했던 질문에 레이첼은 선 듯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으음- 하며 뜸을 들였고, 나이아드는 이전부터 계속 궁금했었다며 레이첼을 큰언니를 바라보는 꼬마의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하긴, 태어난 날도, 외관상의 나이도, 그리고 키-역시 그녀가 나이아드보다 훨씬 언니다워 보이긴 했지만. 레이첼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너무 난처해하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곳에서 답이 튀어나와 주기를 바라는 듯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적당한 대답을 찾았는지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말이에요, 가을에는 과일들도 익고 주변에 먹을 것들이 많잖아요?”
소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레이첼은 또 다시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달님도 못 참고 이것저것 먹다가 저만큼이나 배가 부른 거예요. 그렇게 먹고 나서 보니까 또 너무 살이 쪘나, 하고 고민하며 빛을 열심히 발산하면 먹은 것들이 소화가 될까 해서 저렇게 환하게 밝아져 있는 거구요.”
그녀가 생각해도 우스운 답변이었지만, 나이아드는 정말 그것을 믿는 듯이 ‘우와!’ 하고 감탄사를 냈다. 그러고는 오늘 밤에 달님을 만나면 뭘 그렇게 맛있게 먹었기에 그러는 거냐고 물어보겠다며 남모를 다짐을 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애구나, 싶었다. 아직은 동화 속의 난쟁이들과 작은 꼬마 요정들이 존재한다고 믿을만한 때였으니까. 어쩌면 누군가가 해준 이야기는 곧이곧대로 믿어버리는 그 순진한 성격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고 지내온 탓일지도 모르겠다.
목표한 언덕배기의 끄트머리에 다다르자 그 경사에 나이아드는 멍하니 꽤나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제 힘으로 오르고 싶은지 ‘후앗-!’ 하고 혼자 알지 못할 기합 소리를 내지르더니 레이첼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렇게 작은 손이건만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인지 레이첼은 거의 끌려가다시피 오르막길을 올라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정상부근에 도착하자마자 소녀는 지쳤다는 듯이 그대로 풀밭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고, 그 순간 눈앞의 펼쳐진 풍경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기에 바빴다. 주변이 탁 트여있어 두 눈 안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없을 것 같은 풍경이었다. 자그마한 나이아드에겐 그 것이 너무도 어색하고, 또 정말이지 신기하고 놀랍기 그지없었다. 조금은 경외심마저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하늘엔 아직 두 뺨을 가득 상기시킨 서녘의 남은 빛줄기가 사라지지 않았지만, 어슴푸레 주변이 점차 그림자의 장막에 둘러싸이는 것을 보니 머지않아 달이 떠오를 모양이었다.
‘만월….’
그렇게 둘이서 달이 떠오르는 것을 기다리다 레이첼은 문득 다른 이들은 알지 못할 자신의 등 위의 또 다른 달이 생각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가느다란 등선을 타고 길게 내려오는 그것은 이제 떠오를 달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초승달의 모양을 띠고 있었지만, 이렇게 달맞이를 할 때면 그녀도 모르게 달의 끝부분이 새겨져 있는 어깨부분을 매만지게 되었다. 보얀 아기 피부를 만지는 것 같은 한복의 감촉에 마치 저고리의 자락이 그 문신 전체를 부드럽게 보듬어 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을 빌 거예요?”
그녀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나이아드가 다른 질문을 던진 모양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 하자 소녀는 다시 물었다.
“보름달이 떠오르면 레이첼은 무슨 소원을 빌 거예요?”
“아, 으응 글쎄요….”
“나는 아까 오면서부터 내내 생각했어요. 우응, 추석 때는 달님도 마음씨가 넉넉해져서 소원을 곧잘 들어준다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도 꼭 소원을 빌 거예요.”
‘누가’ 자신에게 그렇게 말해주었는지는 저도 모르게 생략해버리고는, 나이아드는 그저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나이아드의 뺨이 조금은 수줍은 듯이 연분홍빛 꽃잎으로 물들었다. 보슬보슬한 머리의 색과 어울려 나이아드 그녀 자체가 한 송이의 코스모스 같아 보였다. 저무는 바람에 꽃잎이 날리는 코스모스 한 송이. 그러나 그 뒤에, 쉽게 눈치 채지 못할 아련함이 짙게 묻어나오는 것은 소녀도 어쩔 수 없었다. 그 마음조차 사라져버리게는 아직 할 수 없었던 나이아드였다. 아직은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던 -장난삼아 내용이 바뀌어버리기도 했지만- 그 목소리 역시 아직 바스러져 사라지게 내버려두기엔 소녀는 너무 어렸다. 코스모스 꽃잎 물든 짧은 커트머리 사이 밑으로 가느다랗게 땋은 양 갈래 머리가 들녘을 스치는 바람에 흐트러졌고, 그 사이로 보이지 않던 양의 귀가 자그맣게 바람의 속삭임 소리를 듣는 듯이 꼼지락 하고 움직였다. 바람이 전해주는 내용이 무엇인지 문득 나이아드의 표정에 전에 보지 못한 쓸쓸한 무언가가 걸렸다.
그 표정에서 물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느꼈는지 레이첼은 말없이 나이아드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소녀의 눈높이로 몸을 낮추며 조심스럽게-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셀리안이 빌고 싶은 소원은 뭐예요?”
다시 제대로 공간을 찾아온 소녀의 눈동자가 다시 반짝하고 별빛을 담아 빛났다.
“저의 ‘이름’을 불러줄 누군가의 따스한 품을 찾아달라고 할 거예요.”
‘아, 그렇구나. …역시 외로운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이아드의 얼굴에는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보고 있는 다른 이들마저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그런 미소. 진실 된 웃음을 짓는 법을 아는 이만이 지을 수 있을만한 그런 미소였다. 안심하고 그녀는 빙글 웃었다.
“아앗, 그러고 보니 소원은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말해버렸다…. 어떡해요? 으우….”
조마조마해하는 목소리는 역시나 그 말을 절대적으로 믿는 그런 순진함이 담겨있었다. 레이첼은 왠지 이것만큼은 믿음을 바꾸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요, 달님도 그 정도는 눈감아줄걸요?”
:추석맞이 첫번째 과제 :D 같은 인형간부인 류나님의 레이첼 아즈마리아 양과 함께한 미션입니다.
제가 첫타였는데 너무 늦어져서 그저 죄송할 따름이구요..ㅠㅠㅠㅠ
그리고 다음의 류나님의 아트가 기대되서 행복해 죽겠네요 u///u 아우, 드디어 하나 더 끝났다!
역시 전 마감이 다가오지 않으면 죽어도 쓰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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